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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아홉 번을 덖고 비비는 이유
이름 : 로아차 2006-05-20 23:14:22, 조회 : 16,654
Homepage : http://www.loacha.com

아홉 번을 덖고 비비는 이유

0부터 9까지 써서 모든 수를 표시하는 십진법을 사용한 이래로, 구(九,9)라는 숫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귀한 수(동양에선 왕이나 황제를 상징,서양에선 천계나 천사를 상징), 완전 무결한 수, 성스러운 수(聖數)로 여겨져 왔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에도 왕이 사는 궁궐은 구중궁궐(九中宮闕)이라 부르고, 산길이 꼬불꼬불하고 험한 것,
또는 세상이 복잡하여 살아가기 어려움을 나타낼 때 구곡양장(九谷羊腸) 또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이란 말을
쓰고,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것을 구사일생(九死一生)이라 표현하는 것 모두 숫자 구(九,9)를 위와 같이 여겨 사용하는 예(例)의 일부분입니다.

한약재, 특히 생지황이란 약재를 숙지황으로 만들때 쓰이는 방법인 아홉 번을 찌고 아홉 번을 햇볕에 말린다는 의미의 구증구포(九蒸九曝)란 용어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녹차를 만드는 최상의 방법인 것으로 알려져 내려온 데에도 숫자 구(九,9)에 대한 위와 같은 심리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으리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생지황(좌)과 구증구포한 숙지황(우)]


물론 우리나라 녹차를 만드는 방법 중 말 그대로 아홉 번을 찌고(九蒸) 아홉 번을 말려(九曝) 만드는 방법은
없습니다. 보통은 아홉 번을 덖고 아홉 번을 비빈다는(또는 그만큼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표현을 빌려다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를 두고 굳이 아홉이란 숫자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하고 의미를 축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아홉번을 덖고 비비는 것 자체가 아홉 번은 커녕 두세 번 만 하여도 이미 찻잎이 깨지거나 부셔져 버리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어진 차가 될 수도 없으며 말도 안된다는 주장도 합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하여는 먼저 녹차를 만드는 과정에 대하여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덖음녹차를 만드는 과정입니다.증제녹차의 경우는 현논의와는 무관하므로 생략합니다)
  
녹차를 만들 생엽이 준비되면, 묵은 잎이나 잡티등 불순물을 제거하고 덖어질 찻잎의 크기가 일정하도록
가지런하게 맞춘 후, 솥의 온도를 높이고 생엽내의 효소 활성을 없애기 위한 '덖음질(1,살청)'을 합니다.
잘 덖여진 차를 솥에서 꺼내 충분히 식힌 후, 찻잎의 모양을 잡고 물에 들어가서 잘 우러 나오도록 하기 위한
'비비기(2,유념)'공정에 들어갑니다.
(이 공정이 한 번에 끝나는 제다법도 있고, 여러 번 반복하는 제다법도 있습니다.)
이후 다시 솥안에서 말리는(배건,焙乾)작업을 하거나 자연건조 또는 열풍/냉풍 건조(3,乾燥)하여 1차로 차를
만듭니다.
건조된 차는 보통은 숙성을 거쳐, 마지막 마무리 작업(4.가향작업이라고도 함)을 하고 분별한 후 포장하면
완성차가 됩니다.

이 네가지 공정은 말 그대로 기본공정으로 이 과정만 충실히 한다면 일반적인 녹차가 만들어 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들어진 녹차에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녹차를 마시면 속을 버린다' 라든가 '갈증을 없애 주어야 할 녹차를 마시면 반대로 목이 마른다'는 등 녹차를 마시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급기야 '녹차의 성질은 차기 때문에 많이 마시면 안 된다' , '체질에 따라 음인(陰人)은 녹차를 마시면
안 된다' 는 등의 이상한 속설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녹차보다 더 차가운 성질을 가진 보리의 경우엔, 보리차로 아무리 많이 마신다고 하여도 '속을 버린다' 라거나
'마시면 안 된다' 라고 하는 경우는 들어보지 못하였는데 말이지요.

'녹차와 보리차의 어떤 차이점이 이러한 결과를 불러온 것일까?'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고 ,
주목하여 살펴본 결과 차이점은 만드는 과정에서 '제대로 완전히 익혀지는가'의 여부에 있었습니다.

보리차를 만들 때는 아주 강한 열로 거의 태울 정도까지 바싹 볶아 보리를 익혀냅니다.

그에 비해 녹차의 경우는, 생엽을 뜨거운 솥안에서 덖어 익혀내지만, 익어 보이는 찻잎을 비비면 다시 파릇파릇 살아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한 번 하는 덖음으로는 효소의 활성을 억제하는 살청만 될 뿐이지 찻잎이 제대로 완전하게 익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완전히 익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보리차를 만들 때와 같이 강한 열을 가하여 익혀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녹차를 비롯한 잎으로 차를 만들 때에는 조금 강한 열에도 겉은 타고, 속은 익지 않습니다.

두번째는 약한 열로 장시간 익혀내는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단순히 열을 계속 가하는 방법으론 찻잎이 눌어 차맛을 버리게 됩니다.

이 두가지의 절충안이 바로 여러 번 덖고 비비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여러 번이 꼭 아홉 번일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정 하나하나의 의미에 맞도록 충실하게 덖고 비벼, 마시는 사람의 몸에 이롭게 찻잎을 완전하게 익혀내는 것이며, 그 횟수는 세 번일 수도 있고, 열 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아홉 번을 덖고 비비는 방법의 차 만들기란 결국,

"원료가 되는 찻잎이 갖고 있는 진정한 가치를 온전하게 끌어내어 좋은 차를 만들려는 의지와 정성이
바로 숫자 구(九,9)가 갖는 완전함이란 의미와 어우러져 제대로 차를 익혀내는 방법"

이란 뜻으로 통용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두번을 덖고 비빈 후 솥안에서 말려 완성 시킨 차(茶)(좌), 아홉번 덖고 비벼 완성시킨 차(茶)(우)]


위의 사진은 여러가지 제다법을 궁리하며 직접 만든 녹차의 샘플 중 일부로, 동일한 생엽을 이용해 만든 차라도 만드는 방법에 따라 완성된 차의 색이 달라짐을 알 수 있고 차의 색만큼이나 맛과 향 또한 다르며,
마시고 난 후 몸 안의 느낌이나 기분등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실제로 아홉 번 덖고 비비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덖음은 제일 중요합니다.
충분히 높은 솥온도에서 적당한 양을 고르게 익혀내야 효소가 비활성화되어 발효가 되지 않습니다.
첫덖음에서 살청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후 덖음이 아무리 잘 되었다하여도 찻잎이 붉게 발효 되는것을 막을 수 없습니다.

첫번째 비비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랜시간 한 방향으로 적당한 힘을 가하여 공굴리듯 비벼 모양을 완전히 잡아 주어야 이후 과정에서 깨지거나 풀리는 것을 막아줄 수 있습니다.

비비느라 뭉쳐진 찻잎은 다시 골고루 헤쳐 풀어줍니다.

두번째 덖음은 첫번째 덖음보다 온도를 조금 낮춘 상태에서 실시합니다.
사실 이 두번째 덖음이 아홉번의 덖음중 가장 힘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첫번째로 비비기를 마친 찻잎은 자체내에서 나온 진액으로 인해 매우 끈적거려 솥안에 눌어붙기 쉽고, 자칫하면 태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로아차의 경우엔 두명이 함께 덖는 방식으로 솥에 붙는 찻잎을 최소화하고, 타거나 눌기전에 솥의 찻잎을
뒤집어 주어 이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두번째 비비기는 강한 힘을 주어 찻잎에서 진이 나올 정도로 한 방향으로 공굴리듯 비벼 주어야 합니다.
비료를 많이 줘서 키운 찻잎의 경우엔 잎의 두께가 얇아 강한 힘을 주어 비비게 되면 십중팔구는 찢어지거나
깨지게 됩니다.
결국 아홉 번을 덖고 비비기 위하여는 원료로 야생상태로 키우는 찻잎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불이 너무 약하면 익지를 않고 그냥 건조되므로 너댓 번도 하지 않아 찻잎이 말라버려 비빌 수 없게 됩니다.
비비기 역시 비빌때 진이 나올 정도로 강하게 비벼 주지 않으면 덖을때 익지를 않고 겉이 그냥 말라 버리므로
아홉 번을 덖을 수 없게 됩니다.  

세 번,네 번... 반복할때마다 찻잎의 색깔이 점점 진해지고, 찻잎이 익어가는 것이 오감으로 느껴집니다.
    
아주(!) 잘(!) 제대로 덖고 비비지 않고서는 일곱 번에서 여덟 번째쯤 되면 거의 비빌 수 없을 정도로 차가 완성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엔 아홉이란 숫자가 걸림이 되기도 하죠....

이렇게 아홉번을 덖고 비비기 위하여는, 로아차의 경우, 네명의 사람(두명은 덖고,두명은 비비고,털고)
1kg정도의 차를 만드는데 (3.건조와 4.마지막 마무리작업은 제외하고) 보통 네시간정도가 소요됩니다.
일반적인 녹차 만들기보다 너댓배의 수고가 더 들어가는 것이지요.

이제 제 이이야기를 조금 할까 합니다.
저역시 처음 녹차 만드는걸 배울 때나 ,직접 녹차를 만든 처음 2년 동안은 일반적인 제다방식의 녹차를 만들었습니다.
  
구증구포란 말은 차를 마시기 시작한 이래로 십여 년이 넘게 들어 왔던 터라, 직접 차를 만들며 의욕을 갖고
실제로 여러차례 시도해보았으나 번번히 타거나 눌고, 잎이 너무 말라 비벼지지를 않는등 불가능한 방법이다 라고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구증구포 하였다는 차를 마셔 보아도 구수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 제 취향과는 완전히 달라 녹차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에 그런 방식의 차 만들기는 아예 제쳐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동생이 함께 차 만들며 살자고 내려왔고, "진짜 환상적인 맛과 향을 내는 녹차를 만드는 방법은
아홉 번을 덖고 아홉 번 비비는 것 외엔 없다" 라는 확신을 심어 주신 분을 만나게 되면서, 마음 한 구석에 묵직하게 남아있던 아홉 번을 덖고 비비는 차 만들기에 대한 의욕이 다시 살아나, 동생과 함께 무수한 시행착오 끝에 나름의 제다방법을 찾아내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 제게 '그 아홉번 덖고 비비는 방식이 전통의 방식이냐, 그 근거가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딱히 대답할 말은 없습니다만...
지금까지 차를 마셔온 경험으로 그 종류가 어찌되었든, 좋은 차는 서로 비슷하게 통하는 맛과 향과, 마시고 난 후의 여운이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직접 만든 차를 평가함에 있어서도 그에 기준을 두려 노력했다고 대답할 수 있을 뿐 입니다.

아래의 글은 故 김운학교수(82년 작고)가 1981년 펴낸 '한국의 차문화'란 책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이 글을 잘 읽어보면 전통의 방식으로 아홉번 덖고 비비는 제다법이 사찰을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원문을 그대로 옮겨 맞춤법등이 현재와 다른 곳이 있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전통 제조법

그러나 우리의 재래식 방법은 지금 대흥사나 화엄사 등지에서 행하고 있는 구증구폭(九蒸九曝)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즉 차를 가마솥에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부비는 제조법이다. 이 과정을 자세히 보면 먼저 찻잎을 따다 고른 다음 가마솥에  불을 피운다. 나무는 이파리 나무가 좋으며 솥은 두꺼운 것이
좋다. 불의 온도가 너무 세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이를 조정하기 위해서는 옆 나무가 적당했다.

  솥은 두꺼워야 열이 오래 계속되고 솥바닥이 손으로 대서 따끈한 정도일 때 불을 죽이고 차를 넣었다. 이것을 주걱이나 손으로 저으며 찻잎이 살짝 익도록 덥힌 다음 옆의 멍석에 내놓고 쥐는 듯 부비는데
손바닥이 뜨거웠다. 찻잎에서 진이 나오도록 부비는데 뜨거울 때 부벼야지 식은 것을 부비면 비린내가
난다. 다시 솥에 덖은 다음 또 부빈다.
차차 잎이 말리기 시작한다. 그러니 부빌 때는 반드시 손에 찐득찐득한 진이 나게 하면서 말려야 한다.

  처음은 좀 힘들게 부벼지지만 뒤부터는 점점 약하게 부벼야 한다.
이 과정이 횟수를 거듭할수록 빛깔은 점점 검푸르러지고 모양도 가늘게 꼬시러진다.
이 과정이 아홉 번까지 가야 가정 완전하게 잘 만들어지는 것인데 대개는 6,7번에 끝난다.
이것이 아홉 번까지 못 간다는 것은 6,7에 이미 다 말라 더 찌고 부비면 부서지기 때문이다.  
더 할래야 할 수 없게 돼서 이렇게 중간에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아홉 번까지 가게 하는 데는 정밀한 법이 필요하다. 아홉 번까지 되어야만 검은색 나는 진줏빛이 되며 차가 완전히 제 맛을 내게 되는 것이다. 빨리 된 것은 그 빛깔이 푸르다.
이것은 그 맛도 풀내가 난다. 그러니 차의 빛깔만 보아도 그것이 구증구폭이 다 되었는가 안 되었는가를 판별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제조법은 그 차에서 정을 가장 많이 뽑아내 그것을 우려마시는 이치다.  
때문에 차는 그 보관에 잇어서도 찻독에 창호지를 깔고 삼중지로 밀폐해 그 정이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해 처음 만든 차는 화엄사나 백양사 등지에서는 먼저 조사전에 공양 올리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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