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믈린 궁전의 종소리' 라 불리는 1악장 도입부의 엄숙하고 장중한 피아노의 터치가 특징적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 첫번째 곡입니다.
Sergei Rachmaninov -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1901)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Rachmaninov/Rakhmaninov), 1873~1943)는 작곡가로도 유명하지만, 그 자신이 아주 뛰어난 피아니스트입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라흐마니노프를 가리켜 ‘6피트 반의 괴물’이라고 부를만큼 190㎝의 거구인 그는 한 손으로 13도 음정을 거뜬히 짚을만큼 손이 크고 그 힘도 대단했다고 합니다.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면 바로 그런 피아노의 강렬함에 매료됩니다.
먼저 감상해 보시죠.
'앙드레 프레빈'이 지휘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연주에 피아노 협연은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 입니다.
(1970년 4월부터 1971년 11월까지, 런던 킹스웨이 홀에서 진행된 녹음)
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를 익히고, 9세에 페테르스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와 작곡법을 배운 라흐마니노프는, 19세에 졸업작품으로 작곡한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C# minor"가 런던에 소개되어 호평을 받으며 작곡가,지휘자,피아니스트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24세인 1897년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초연된 "교향곡 1번"의 평판이 좋지 않아 신경쇠약증세에 빠집니다. 특히 음악평론가 '세자르 위'의 악평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 만약 지옥에 있는 음악학교에서 재앙을 주제로 교향곡을 쓰도록 해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을
제출했다면, 그는 과제를 멋지게 수행한 것이다.' - 노보스티 1897년 3월 17일 -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의 우울증을 악화시킨 또 한 가지는 사촌 '사티나'와의 결혼실패입니다. 그 당시 결혼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정교회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근친간의 결혼은 금기사항이었습니다. 일과 사랑의 실패로 그는 심각한 무기력증에 빠졌고, 작곡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합니다. 우울증과 신경쇠약증세로 고생하던 그는 최면전문가인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갑니다. 작곡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암시를 주로하는 치료를 받은지 3개월 후, 4년여간 하나의 곡도 완성하지 못했던 극심한 절망과 좌절을 털고 일어나 불후의 명곡으로 남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합니다.
성당의 종탑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강렬한 화음과 급격하게 이어지는 피아노의 장렬한 터치를 통해,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을 무기력증으로 몰아넣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어,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그대로 작품속에 펼치며 시원하게 풀어냅니다. 이어지는 오케스트라의 총주는 느리지만 장중하게 멜로디를 토해 냅니다. 홍수에 터져나온 폭포수처럼, 볼가강의 강물을 연상시키는 볼륨 넘치는 오케스트라 위로 화려한 피아노 소리가 격정적으로 흐릅니다.
모데라토(적당한 빠르기)의 1악장을 들으며 오가피차를 한 모금 마십니다.
쓴 맛과 향이 충격처럼 강렬하지만, 뒤이어 쓴 맛을 보상하는 부드러운 달콤함이 입 안을 감돕니다.
피아노의 오르락 내리락 거리는 선율을 따라 차가 천천히 온 몸으로 스며듭니다. 따뜻한 봄볕이 얼어붙은 대지를 서서히 녹이듯 굳었던 몸과 마음도 차와 음악에 젖어 조금씩 풀어집니다.
오가피차의 진가는 2악장에 접어들며 드러납니다.
아다지오 소스테누토, 느리면서 침착하게 연주하되 음 하나 하나 충분히 눌러서 무겁게 하라는 지시처럼 오가피차의 부드러운 후감(목으로 넘긴 후 느끼는 단맛)속에는 심지 곧고,뚝심있는 강인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온 몸으로 열기가 되어 퍼집니다. 보드라운 봄바람을 맞듯이 사지가 나른합니다.
쉼, 편안함... 긴장이 풀립니다.
이렇게 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기운이 불쑥 솟아 오릅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한 안성맞춤의 움추림일까요.
시나브로 음악은 3악장에 접어듭니다. 알레그로 스케르찬도, 빠르고 경쾌하게 연주되는 음악처럼, 활기차고 젊어진 건강한 신체를 느낍니다.
대지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고, 강렬하지만 따갑지 않은 햇살의 '뭐든 할 수 있다'는 격려를 받으며 나는 다시 나로 일어섭니다.
고통 끝에 다시 일어나는 계기는 아주 사소할지 모릅니다. 짧은 봄볕에도 들꽃은 꽃을 피우는 것처럼.
친구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요제트 호프만은 말했죠.
"라흐마니노프는 황금 가슴을 가진 남자 였다"고. 라흐마니노프의 가슴이 황금처럼 빛난 이유는 아마도 좌절을 딛고 다시 일어서려는 강인한 의지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1. 영국에서는 '아슈케나지'의 연주를 선택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단연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가
손꼽힙니다. 1959년 '스타니슬라프 비슬로츠키'가 지휘한 '바르샤바 필하모닉'이 연주하고 '리히터'가 피아노 협연한 곡도 함께 들어보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