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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2. 음(飮)에서 품(品)으로... 당나라의 차문화 (1)
이름 : 로아차 2011-11-30 08:40:26, 조회 : 32,960
Homepage : http://www.loacha.com

2. 음(飮)에서 품(品)으로... 당나라의 차문화 (1)


◎ 법문사 유물

1981년 8월 24일.
중국 시안(西安)의 법문사 주변에는 열흘 이상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사찰 위로 천둥번개가
치더니 13층의 팔각 진신보탑이 두동강 났다. 400 여년간 서 있던 탑의 서쪽면이 마치 예리한 칼에 베인 듯
꼭대기부터 반쪽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86년 나머지 절반도 완전히 무너져 버려 그 해
가을 시안시 당국은 탑을 철거했고, 이듬해 봄 유물 발굴작업을 시작했다.









【 1981년 무너졌을 당시의 탑(위)과 현재 복원된 탑(아래)】
법문사 탑은 17세기 명나라때 재건축된 것으로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전탑이다.
높이는 47m, 8각 1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1987년 4월, 발굴팀은 바닥에서 조그만 굴을 발견했다. 그걸 파고 내려가다 돌문을 발견한다. 지하궁의
입구였다. 그 속에선 전설의 불지(佛指)사리가 보물 3,000 여 점과 함께 나왔다. 불지사리란 석가모니를
다비(기원전 485년)하고 난 후에 남은 손가락뼈다. 7일동안 화장(火葬)을 했는데도 재가 되지 않은 길이
3.7cm의 진신(眞身: 부처의 몸)사리다. 석가세존이 남긴 사리는 8만 4,000 여개다. 그것들은 기원전 240년
인도 아소카 왕에 의해 나라 안팎으로 흩어졌다. 포교를 위해서이다. 중국으로 간 18명은 불지사리를 포함한
사리함 19개를 현재의 법문사 터에 묻었다. 그리고 남겨진 문헌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서역의 고승
안세고(? ~ 170?)가 서기 148년(후한 환제 2년) 발굴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황제인 후한의 환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아육왕사란 절을 세웠다. 후일 당나라의 황실사찰이 되는 법문사의 전신이다.

이후 진신사리는 황제들만 친견하는 귀한 보물이 되었다. 당나라 의종(재위 859 ~ 873년)때인 함통咸通
14년(873)에 마지막으로 친견의식을 수도인 장안에서 치루고 법문사 지하궁에 봉안하였다. 이는 법문사
지하궁 전실에 들어가기 위한 문 앞에 새겨진『진신지문비(眞身志文碑)』와『헌의물장비(獻衣物帳碑)』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다.

『지문비』에는 남북조시대의 북위때부터 당나라 때까지 역대 황제들이 법문사에 들러 불지사리를 친견하고
공양물을 바치며 예를 올린 것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고,『물장비』에는 당나라 의종, 희종 황제와 그 권속,
그리고 고승들이 불지사리에 공양한 공양물 및 정황등이 상세히 적혀 있다.

이것이 발견되었을 때, 부처의 진신사리에 대한 진위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최초의 발견과정 자체가 석연치
않아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에 만들어진 후대의 위작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아울러, 일각에서는 불지
사리가 사람뼈가 아닌 물개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진위여부를 밝히기 위해 시뻘겋게 달궈진 쇠그릇 속에서 테스트를 했지만 영물은 색깔조차 변하지
않았고, 이것을 유네스코는 세계 9대 기적중 4번째 기적으로 지정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정말 귀중한 보물이라면 만의 하나라도 파손될까 염려되어 그런 가혹한
테스트를 할 리도 없을 뿐더러, 유네스코에는 '세계 9대 기적'이란 항목 자체가 없다.(참고자료 1)
하지만 2005년 11월 한국순회 전시 당시 주최측의 주장대로 위의 내용이 검증없이 방송/보도 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입장료가 '기도발원및 친견에 따른 비용'으로 1인당 만원이었다고 하니, 누군가는 엄청
나게 벌었을 것이다.
자신의 뼈(?)를 갖고 장사하는 제자(?)들을 보고 부처님이 뭐라 말씀하셨을런지....
뭐 이 정도로 불지사리에 대한 이야기는 접도록 하자.









【불지사리(위), 8중보함(사리함,아래)】
불지사리는 길이 3.7cm, 너비 2cm ,무게 16g 으로 순금으로 만들어진 조그만 사리탑
안에 넣어져 순금과 칠보로 화려하게 장식된 8중의 사리함속에 봉안되어 있었다.  
8중 사리함의 마지막은 나무상자라서 썩어버리고 7개만 남았다.





법문사의 유물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다른데 있다. 불지사리와 함께 발굴된 유물중에 완전한 형태를 갖춘
당나라 시대의 다기(茶器)가 발견된 것이다. 이제까지 글로 묘사되어 전해지던 당나라의 '다기 일습'이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발굴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앞으로 다시 설명하겠지만 당나라때에는 현재와 달리 차를 우리는 데 쓰는 도구만 다기라 하지 않고, 찻잎을
따고 말리는 도구에서부터 차를 마시는 데 필요한 도구 및 차를 저장하는데 필요한 도구 일체를 다기라 칭했
다. 이는 육우(陸羽,733? ~ 804?)가 『다경』을 통해 확립하고,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누어 준
다기일습(현재표현으로 하자면 다구세트)에서 유래하였으며, 이후 당나라 시대 전반에 걸쳐 유행하였다.
(육우의 다기일습은 모두 24 가지로 구성되며 그에 대해서는 다음회 글을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당나라의 음다법(飮茶法,차 마시는법)은 덩어리로 만든 차를 가루로 내어 끓여 마시는 자다법(煮茶法)이
주를 이루었다. 아래의 몇가지 법문사 유물을 살펴보며 당시 차 마시던 모습을 그려 보자.





【류금 비홍구로문 은롱자(류金飛鴻救路紋銀籠子)】 전체 높이 17.8cm 다리 높이 2.4cm 무게 654g
덩이차를 가루내기 전 건조시키고 떫고 쓴맛을 없애기 위해 불에 쬘 때 사용하던 도구이다.
이름의 '류금'은 금을 씌웠다는(도금했다는) 의미이다.



우선 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덩이차를 불에 구워야 한다. 보통은 집게로 덩이차를 잡고 불에 직접 구웠으나
황실에서는 금사로 짠 바구니(참고자료 2)나 위와 같은 은바구니를 이용해 간접적으로 했다.
현대의 제다기법중 홍배(불을 쬐어 맛내기)와 같은 개념이다.





【류금 홍안유운문 은다연자(류金鴻雁流雲紋銀茶?子)】
덩이차를 가루 낼 때 쓰는 차맷돌로, 다연자와 축으로 구성돼 있다. 다연자는 판금 기법으로 제작됐으며
도금처리 됐다. 전체 모양은 직사각형으로 높이 7.1cm 가로 27.4cm 깊이 3.4cm 가로막 길이 20.7cm 너비
3cm 무게 1,168g 이다. 바닥에‘함통 10년 문사원(文思院)에서 은금화다연자 하나를 제작했다. 전체 무게
는 29냥이다’라고 씌어져 있어 문사원에서 황제를 위해 제작한 다구 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도금한 꽃
무늬가 새겨진 은제 과축(鍋軸)은 손으로 잡는 부분과 원병(圓餠)이라 부르는 바퀴처럼 둥근 부분으로 이
뤄져 있다. 가장자리에는 작은 톱니모양의 띠가 둘러져 있다. 둥근 바퀴 가운데 구멍이 나 있는데 손잡이
를 이곳에 넣어 연결시켰다.




잘 구워진 덩이차는 서늘하게 식힌 후 연에다 넣고 원병을 굴려 가루차로 빻는다.너무 곱게 빻아 가루가
날리면 차를 끓이는 데 좋지 않다. "푸른 가루가 먼지처럼 날리는 것은 가루차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라고
육우가 지적하였듯이 연으로 차를 빻는다는 것은 먼지처럼 가는 가루로 만든다는 것이 아니다.
보통은 단단한 나무나 돌, 도자기로 만들었다.




【류금 비천선학문 곤문좌 은다라자(류金飛天仙鶴紋곤門座銀茶羅子)】
다연자로 차를 가루낸 후 다시 한 번 거르는 기구다. 덮개와 망 서랍, 받침, 비단으로 구성돼 있으며
중간에 가는 망이 두 층 끼워져 있어 찻가루를 걸러준다. 망 아래에는 서랍이 있어 차 가루를 넣어놓
을 수 있다. 판금 기법으로 제작됐으며 도금으로 문양을 넣었다.


차를 다연자로 잘 갈았으면 체에 넣고 걸러서 합에 담는다. 체는 찻가루를 칠 때 체 위에 뚜껑을 덮고 흔들
어 찻가루가 날리는 것을 방지한다. 합에 담아두면 찻숟가락으로 차를 뜰 때 양을 가늠하기 쉬워진다.





【류금 뇌유마갈문 삼족가 은염대(류金雷紐摩갈紋三足架銀鹽臺)】
당대에는 차를 끓일 때 소금이나 생강,박하등과 같은 향신료를 넣어 마셨다. 이 다기는 차에 넣어 먹는
소금이나 후추 등을 담던 용도로 쓰였다. 받침 접시는 소금을 놓는데 쓰였으며 연꽃봉오리 뚜껑 손잡이
부분에는 다른 조미료를 넣은 것으로 보인다. 높이 25cm 덮개와 받침 다리 3개가 있다.
표면에는‘함통 9년 문사원에서 도금 은염대 하나를 제작했다’고 적혀 있다. 염대(鹽臺) 표면에 새겨진
마갈은 인도 신화에 나오는 코가 길고 예리한 이빨에 물고기처럼 생긴 동물을 말한다.






【호문고권족좌 은풍로(壺門高圈足座銀風爐)】
물을 끓일때 사용하는 화로이다. 화로의 높이는 252mm, 입구 지름 207mm. 몸통지름 165mm, 다리 바깥쪽
지름 346mm, 무게 3,920g 으로 판금 기법으로 주조돼 있었으며 덮개와 몸체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덮개에는 대은향로신양복공(大銀香爐臣楊腹恭)이라 쓰여 있다. 당시 楊腹이라는 황후가 바친 것으로 보인다.


찻물을 끓이는 화로를 풍로라고 부른다.앞에 풍(風)자를 붙인 이유는 바람은 공기의 흐름이자 화력을 조절
하기 때문이다. 풍로는 불이 붙는 텅빈 공간이다.물은 불을 제압한다.밑에서 위로 부는 바람은 물과 불을
중개하는 매개물이다.  음양오행사상의 영향이 짙게 배어있다.




【류금 은조달자(류金銀調達子)】
높이 11.7cm, 덮개직경 5.6cm , 몸통직경 5.3cm,다리직경 6.3cm, 무게 149.5g
조달자는 차를 배합하고 마시는 다기로 판금성형으로 도금하였다.속이 깊고 평평하며
나팔꽃 모양의 다리와 몸통,그리고 덮개로 이루어져 있다. 전면의 인물은 광대이다.


조달자안에 찻가루와 부수적인 재료(소금,향신료)를 넣은 다음 끓인 물을 넣고 걸쭉한 상태로 만들었다가
다시 끓인 물을 붓고 차탕을 만들어 찻잔에 부어 사람들에게 마시게 했다. 당나라 후기로 내려오며 황실에선
이런 식의 음차법도 생겨났다.





【당나라시대 중국에서 제작된 유리 찻잔과 받침】 전체높이 5.3cm, 높이 4.6cm,지름 12.7cm
지하궁에서 출토된 20개의 유리 제품 중 유일하게 중국에서 제작된 것이다.  



현대에 와서 유리로 만든 찻잔이라면 도자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내리지만,당나라 때만 하더라도
유리는 최첨단의 소재로 대부분 수입해서 사용하였다. 이 찻잔과 받침은 중국에서 유리로 만든 최초의 다기
이다.





【오규구권족 비색자완 (五葵口圈足秘色瓷碗)】 5개 해바라기 꽃잎 모양의 비색자기



【이구비색자완 (移口秘色瓷碗)】 구경이 과장된 비색자기



당나라 시가에 등장하던 유명한 궁정 도자기이다.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도요지에서 만들어 황실에
진상하던 특제자기이다. 유약이나 제작과정이 비밀에 부쳐지기 때문에 이름에 '비색秘色'이 붙었다.
법문사의 비색자기는 모두 13점이 발견되었으며 당나라 시가를 통해 구전되던 것이 실물로 출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당나라 문화의 발전 배경


수나라는 비록 37년(581~618)밖에 존재하지 못했지만 16국, 동진, 남북조시대의 278 년간의 분열을 끝내고
진한(秦漢)이후 세번째로 중원및 남북 중국을 통일했다. 통일외에도 수나라는 과거제도및 행정법률제도를
창시했고 수나라 동부의 도성인 낙양과 양주를 건설했다. 특히 남북 대운하의 성공적인 수축(修築)은 당나라
시대의 진보와 번영뿐만 아니라 향후 중국 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수나라가 통일을 이룬지 12년이 지난 태평성세에 문제의 뒤를 이어 양제가 등극했는데,그때 관아의 창고에는
양곡과 피륙이 산처럼 쌓이고 호적에는 900 만호가 등록되어 있었다. 이는 진晉나라 멸망당시 400만호였던
것에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양제는 이를 바탕으로 낙양과 대운하의 건설이라는 큰 대업을
실시했다. 이것은 몇 세대를 이어가면서 감당해야 할 거대한 일을 짧은 시간동안 수나라 900만호의 농민들이
떠 맡은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낙양성의 수축을 위해 수백만의 사람이 동원됐는데 그 중 약 절반이 과로로
죽었다고 한다. 천하통일은 수나라의 통치자인 양제에게 전례없는 수많은 재물과 수시로 징용 가능한 100만
명의 병사와 노동력을 안겨 주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대업을 실현하자 양제는 세상에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양제의 이런 자만심은 수많은 수나라 백성들을 세 차
례에 걸친 고구려 정벌의 수렁으로 밀어넣었고, 마침내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없게 된 백성들의 대대적인
반항을 불러 일으켰다.

수나라 말년의 동란으로 다시 천하가 혼란에 빠지자 곳곳에서 패권을 잡기 위해 나선 사람들의 쟁탈전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당국공 이연과 이세민 부자가 쟁탈전의 최후 승리자가 되었다.
이연 부자가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켰을 때 이연은 평범하고 담력이 작아 18세에 불과한 이세민이 주도했다고
전해지지만, 온대아의『대당창업기거주』에 의하면 이세민의 특별한 군사적 활동은 보이지 않고 그의 공도
형 이건성보다 나은 점이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조 이연은 용감하고 모략이 풍부했다. 그는 태원에서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했는데, 그것은 장자 건성과 삼자 원길에게 명해 수나라 양제가
또 고구려를 정벌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백성들의 불만을 자아낸 일과 수나라 양제의 충신들을 미리 제거한
일 등이다. 하지만 개국 군주로서의 당나라 고조는 정사에는 수나라 문제처럼 부지런하지 못했고, 심지어
옛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군주의 격식을 잊고 자유롭게 보내기를 원했다. 그때 이런 고조의 성품에 가장
불만을 품은 것은 이세민이었다. 사실 고조가 황제의 격식을 차리지 않은 것은 그의 성격외에 그 시대의
형세와 관념과도 관계가 있다.그때 천하를 둘러보면 이미 왕이나 황제로 자칭한 자가 몇인지 모르는 형편이
었다. 당나라 정권이 이 패권 쟁탈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원인은 결국 천시,지리,인화의 세 조건에서 전부
우세를 점했기 때문이다.

290년 역사를 가진 당나라(唐 618년 ~ 907년)는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왕조 중의 하나이다. 전성시대에는
관할한 현이 1,573 개에 달하고 북으로 카스피해, 바이칼호, 한반도의 동해까지 이르며, 남으로 운남,광서,
베트남 북부까지 이뤘다. 호적상으로 인구는 5,288만명이나 실제로는 7,000만명을 넘었다.

당나라 전기는 세습 문벌 귀족 정치 시대로부터 과거 관료정치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이다. 농민은 점차 부곡과
균전민의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작농이나 자유계약 소작농이 되었고, 문벌 출신의 배경없는 보통 선비는 과거
시험에 의해 발탁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전반적으로 사회는 낡은 문벌제도의 억압에서 해방되면서 개방
되고 발전하는 시대상을 형성했다. 당나라 시대에 일인당 양곡 수확량은 평균 700근(=350kg)으로 20세기
중국 개혁개방이후의 수준에 도달했다. 밤에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고, 형구를 폐지해도 될 정도로 사회가
안정되고 치안이 향상되었다.

"군주는 마치 배와 같고 백성은 물과 같아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순자의
말을 금과옥조로 삼은 태종 이세민은 국가의 근본은 백성으로서 우선 백성들이 굶주려서는 안되며, 만약
백성들이 굶주린다면 백성들은 더 이상 국가의 소유가 아니라고 했다. 당나라 태종이 이처럼 백성을 아끼는
것은 그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해 보이지 않는 큰 이익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수나라의 멸망을 보고
깨달아서이다. 이런 정치 철학은 그의 치세기간을 '정관의 치'라 불리게 하였다.

당대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꼽히는 당나라 현종때 개원 전성기는 장장 100 여년 동안 지속된
경제 발전의 결과다. 589 (개황9년)부터 765(천보 14년)까지 조정이 통제한 호적 수는 다음과 같다.
수나라 개황 9년(589)의 호적은 400 여만이었는데,대업 5년(609)에는 900만에 달했다. 그러나 수나라 말년에
일어난 동란으로 당나라 고조때는 200만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다시 당나라 초부터 140년간 계속 늘어나 태종 말년(650)에 380만, 무측천 말년(705)에는 615만이었다.개원
14년(726)에 이르러 또 700만에 도달, 20년 사이에 100만이 늘어났다. 개원 14년부터 22년 까지 8년 사이에
또 100만이 늘어나 800만에 도달했으며, 대업 5년(609)부터 천보 14년까지 150년 사이에 중앙 집권제 봉건
국가가 통제하는 호적 수는 900만호에 근접했다. 호적과 인구의 증가는 조용조세의 상승을 의미한다.기록에
의하면 천보 14년에 납세한 조세는 200 여만민(1민은 1000문), 양곡은 1,980여만곡(1곡은 10말), 비단 740
만필, 면사 180여 만둔(1둔은 6냥),마포가 1,035만단이었다.

이백과 두보는 이 때에 탄생한 중국문화의 정화이다. 비단 이들뿐 아니라 시,그림,조각,음악,무용,복장의
화려함은 어느 하나 중국 역사에서 최고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당나라의 선진적인 경제와 문화는 당시
세계에 대해 매우 큰 흡인력을 가지고 백을 헤아리는 국가의 사신,상인,승려,학생들이 비단길을 따라 당나라
의 법령제도,한자,제지술,인쇄술등을 배우고 동서로 전파했다.

그리고 이 시기 차의 위대한 성인이라 추앙받는 다성茶聖 육우의 탄생은 화려하게 피어나는 당나라 문화 속
에서 역사적 필연이라 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육우와 그가 지은 『다경』을 중심으로 당나라의 차문화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참고자료

1. '세계 9대기적'과 관련하여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게시판에 문의한 결과의 답변은 아래와 같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답변】



2. 금사,은사로 짠 덩이차를 말리기 위한 바구니


【금은사결 조롱자(金銀絲結條籠子)】 높이 15cm ,지름 13.5~14.5cm , 무게 355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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