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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김해 장군차와 허황옥의 진실 (1)
이름 : 로아차 2011-03-31 11:43:00, 조회 : 24,705
Homepage : http://www.loacha.com

김해 장군차와 허황옥의 진실 (1)



◎ 창조사학 ?????

    중국 한(漢)나라 때 광무제의 박해를 피해 동이족이었던 수로(首露)라는 사람은 A.D. 42년
    동료들과 함께 한반도 김해에 상륙해 변한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을 세우고 김수로왕이
    되었습니다. 김수로 왕의 가락(가야)국에서 제철산업을 크게 일으켜 해상을 통해 중국과
    일본 등지로 철을 수출하는 상선 500척을 보유한 해상왕국을 세웠습니다.

    수로가 가락에 도착한지 6년 후인 A.D. 48년에는 지금의 인도 지역인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이 신하 두 내외와 20명의 선원을 데리고 배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삼국유사에는 허황옥이 불교를 전하기 위해 파사(페르샤)의 석탑을 가지고 온 것처럼
    묘사했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허황옥은 가야에 도착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며 자신이
    온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금년 5월 제가 본국에 있을 때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 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어 짝을 삼게 하라'
    하시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 가셨다고 합니다.
    부모님께서 잠을 깬 후에도 상제의 말이 아직 귀에 쟁쟁한지라 저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곧 이곳을 떠나 그리로 가라 하시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상제(上帝)는 전통적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와는 아무 관련이 없습
    니다. 허황옥이 가야에 도착한 A.D. 46년은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로
    들어가 선교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도마를 비롯하여 시몬, 다대오 등 사도들이
    활동하던 선교 중심지였습니다. 외경인 '도마행전'에는 사도 도마가 인도에 들어가 처음
    전도하여 침례를 준 사람이 인도의 공주이며, 왕과 왕비도 침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허황옥의 배가 처음 도착한 곳을 가야 사람들은 '주님의 포구'라는 뜻에서 주포(主浦)라
    불렀습니다. 삼국유사를 쓴 김견명(일연의 속명)이 말한 파사의 석탑은 실은 가공한 돌이
    아니라 평범한 자연석 6개를 쌓아 놓은 것일 뿐입니다.
    허황옥이 자신의 배에 돌 여섯 개를 싣고 온 이유는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갈릴리의 배
    만드는 기술자였던 사도 도마의 충고를 받아 들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김해에 있는 수로왕릉의 납릉 정문에는 석탑 모양의 그릇을 가운데에 두고 두 마리의 물고
    기가 마주 보고 있는 그림이 있는데, 이 그림은 갈릴리의 오병이어 교회에 있는 모자이크와
    같은 형태입니다.
    허황옥과 결혼한 수로왕은 국호를 가락국에서 '가야'로 바꾸었는데,'가야'는 드라비다어로
    물고기를 의미합니다. 물고기는 초대 교회의 기독교인 사이에 사용된 암호였습니다.
    헬라아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말의 이니셜이 물고기 즉
    "익투스(ichthus)" 라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무려 2,000년 전에 이 땅에 기독교가 전파되었고, 가야의 김수로왕은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
    이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현재도 경상도 사람 중에는 인도 공주 허왕옥의 일행의 핏줄이
    섞여 서구적인 외모를 갖는 미남 미녀가 많은 편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도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데 딸은 인도 사람처럼 생겼고, 아들은 서양
    사람(인도사람과 백인은 야벳의 후손으로 같은 유전적 형질)처럼 생긴 집안이 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유전적 형질이 수십대가 지난 뒤에도 보존되 있다가 그대로 나타난 것입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 5대 왕인 파사(婆娑) 이사금이 수로왕을 매우 존경하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초청해 자문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금이 자신의 왕호를
    굳이 페르시아를 의미하는 파사로 바꾼 이유는 아마도 허황옥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1956년 불국사 경내에서 발견된 석재 십자가와 영남 대학교 박물관 지하실에 보관된 양을
    품고 있는 석상 등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합니다.
    신라의 화랑도도 메시야를 상징하는 꽃인 무궁화를 머리에 꽂고 다니고, 특이한 사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를 믿는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김성일,《창조사학》강연중에서...



'창조사학'이란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에 따라 우리 역사(특히 고대사)를 재해석하여 역사를 고쳐 쓰겠다는
한국 근본주의 기독교의 한 분파이다. (자신들의 종교에서 믿는)인간을 창조한 신을 단군 신화에 나오는
환인과 같은 신적 대상과 일치시키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가능한 이론을 부정하며,신빙성이 떨어지는 주관
적인 해석으로 일관된 비과학적 내용을 증거로 삼아 세계 모든 인류가 한민족의 갈래이며, 그 종주가 한민
족에게 있다고 말하는등 사이비 민족주의와도 그 맥이 닿아있는 궤변의 논리를 내세운다.
위의 짧은 글에서도 느낄수 있듯, '창조사학'은 만인을 공통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한 증거라곤 전혀 없으며
그 증명방식이 너무나도 저급하고 비과학적이라 신뢰도가 매우 떨어지는 사이비 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는 작은 나라였다. 넓은 영토, 강력한 지배, 화려한 문화, 탁월한 영도력 등 우리가 은연중에 역사의
미덕으로 삼고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지도상에 표기해 보면 아무리 최대로 잡아도 한반도 내에서 너무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백두대간 남쪽의 동쪽 자락과 서쪽 일부,낙동강 서안과 동안 일부 지역에 불과하다.
중국과 일본까지 주변에 그려 놓으면 가야의 실체는 더 초라하게 보인다. 그 작은 영역조차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도 못하고 조그만 소국으로 제각기 나뉘어져 있다가, 결과적으로 신라에게 하나씩 병합되고 말았다.
가야는 그 작았던 실체만큼이나 만만한 존재이기도 해서, 후대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쉽게 감염
시켰다. 신라중대에 이미 불교적 색채로 가야의 일부분을 채색하였으며, 8세기 초 일본에서는 천황주권 아래
가야를 재편해 버렸고,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임나일본부설'로 식민사학의 희생양으로 삼기도 했다.
심지어 1980년대 말에는 기독교와 가야와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위와 같은 '창조사학'이라고 하는 황당한
견해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현재에도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 아래의 신문기사는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0년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인도 '인연'

   【뉴델리=뉴시스】우은식 기자 = 이명박 대통령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2,000년 세월을 뛰어넘는
   양국의 인연이 화제가 되고 있다.
   특히 김해 김씨(金氏)인 김윤옥 여사가 고대 인도 왕실과 혈연으로 이어져 있다는 점에서 인도
   측에서도 이 대통령 부부의 방문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김 여사는 고대 가락국(가야)의 시조대왕인 김수로왕과 인도 아유타국 왕실의 공주 허황옥의
   후손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편에 따르면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現 아요디아) 왕실의 허황옥은 먼 항해
   끝에 당시 철기문화를 꽃피웠던 해상왕국 가락국에 도착해 김수로왕과 혼인했다.
   가락이라는 말은 인도 고대어로 물고기를 뜻한다.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는 형태의 쌍어(雙魚)를
   아유타국 사람들은 숭배했고, 이것이 가락국의 이름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허 왕후(王后)의 고향인 아유타국은 기원전 6세기-서기1세기에 번성한 도시국가였다. 허 왕후는
   1세기경 아유타국이 북방 이민족의 지배를 받자 중국을 거쳐 가락국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허 왕후는 별세하기 전 이국에 와서 자신의 성(姓)이 전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했다. 김수로왕은
   이를 알고 아들 10명 중 두 아들을 허씨(許氏)로 사성하여 대를 잇게 했다. 이후 김해 김씨, 허씨,
   인천 이씨(허씨에서 分籍離)가 가락의 후손으로 번성하게 되었다.
   인도와 한국의 혈연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려는 움직임은 국내에서 10여년 전부터 본격화됐다. 가락
   중앙종친회는 2000년 성금을 모아 대형기념비를 제작한 뒤 인도에 탁송했다. 또 같은 해 아요디아市에
   1000평 규모의 가락공원을 조성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2007년 주한 인도 대사 빠르따사라띠는 김수로왕과 인도 공주의 사랑과 혼인
   과정을 그린 소설 '비단왕후'를 펴냈다.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방한한 압둘 칼람 전
   인도 대통령을 접견했을 때 이 소설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칼람 전 대통령은 "제 친구인 인도대사가 한국과 인도의 왕족 간 사랑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
   이라며 '비단왕후'를 이 당선자에게 내보였다. 이 대통령은 "김수로왕이 인도의 공주를 맞아 결혼
   했다고 역사에 적혀 있다"고 화답하자, 동석한 빠르따사라띠 대사는 "삼국유사에 그렇게 돼 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칼람 전 대통령은 이에 "한국과 인도 간의 역사적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가 많이 나오면 양국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인도간의 인연을 강조했다.  (이하 후략...)
            
                                     《뉴시스》 2010-01-25 기사.



신화는 그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어떤 경우엔 역사적 사실보다 더 중요한 내용을 알려주기도 한다.
문제는 신화를 무언가 의도를 품고, 고의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둔갑시키려 할 때이다. 상징성에 머물러야
할 신화가 역사의 사실이 되는 순간, 신화의 상징성은 이념의 도그마가 되어 우리가 지키고 따라야 할 진리
로 승격된다.
그러므로 신화가 역사적 사실이 되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한 객관화된 검증이 필요하다. 엄정한 비판을 거친
증거자료, 즉 사료를 가지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인과관계를 찾아내고, 이를 인간사회의 보편적인
이성과 상식을 바탕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별다른 검증없이 신화의 내용을 가져다 편의에 맞춰 윤색해서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창조사학'이나 위의 신문기사나 별로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허왕후는 과연 이역만리 인도로부터 가야로 시집 온 것일까? 우리의 본격적인 고대사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루어진 국제결혼은 과연 가능했을까? 그리고 김해의 차나무는 허황옥이 시집올 때 가져온 차씨를 심은
것이 번성한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 허황옥이 등장하는 최초의 책,『삼국유사』부터 살펴 보자.


◎ 『삼국유사』에 나오는 허황옥의 기사


     건무(建武) 24년 무신 7월 27일에 구간(九干) 등이 조회할 때 아뢰기를 “대왕이 강령하신
     이래로 아직 좋은 배필을 얻지 못하셨으니 청컨대 신들의 집에 있는 처녀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을 골라서 궁중에 들여보내어 항려가 되게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여기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령이니 짐에게 짝을 지어 왕후(王后)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하늘의 명령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라고 하고, 드디어 유천간
     (留天干)에게 명하여 경주(輕舟)를 이끌고 준마(駿馬)를 가지고 망산도 (望山島)에 가서 서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 (神鬼干)에게 명하여 승점 (乘岾)으로 가게 하였다.
     갑자기 바다의 서남쪽에서 붉은색의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매달고 북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은 먼저 망산도 위에서 횃불을 올리니 곧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뛰어왔다.
     신귀간은 이것을 보고 대궐로 달려와서 그것을 아뢰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여
     이내 구간(九干) 등을 찾아보내어 목련(木蓮)으로 만든 키를 바로잡고 계수나무로 만든 노를
     저어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이에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본래 모르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서로 따라가겠는가”라고 하였다.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달하니 왕은 그렇다고 여겨 유사(有司)를 이끌고 행차하여, 대궐
     아래로부터 서남쪽으로 60보쯤 되는 곳의 산 주변에 장막을 쳐서 임시 궁전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밖의 별포(別浦) 나루에 배를 대고 땅으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고 있는
     비단바지를 벗어 폐백으로 삼아 산신령(山神靈)에게 바쳤다. 그 밖에 시종한 잉신(?臣) 두 사람의
     이름은 신보 (申輔)· 조광 (趙匡)이고, 그들의 아내 두 사람의 이름은 모정 (慕貞)·모량 (慕良)
     이라고 했으며, 노비까지 합해서 20여 명이었다. 가지고 온 금수능라(錦繡綾羅)와 의상필단
     (衣裳疋緞)·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된 장신구들은 이루 기록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왕후가 점점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니 왕은 나아가 글를 맞아서 함께 유궁(?宮)으로 들어왔다.
     잉신 이하 여러 사람들은 섬돌 아래에 나아가 뵙고 곧 물러갔다. 왕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잉신 내외들을 인도하게 하고 말하였다.“사람마다 방 하나씩을 주어 편안히 머무르게 하고
     그 이하 노비들은 한 방에 5, 6명씩 두어 편안히 있게 하라.” 난초로 만든 음료와 혜초(蕙草)로
     만든 술을 주고, 무늬와 채색이 있는 자리에서 자게 하고, 옷과 비단과 보화도 주었고, 군인들을
     많이 모아서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왕후와 함께 침전(寢殿)에 있는데 왕후가 조용히 왕에게 말하였다.
     “저는 아유타국 (阿踰陀國)의 공주로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 (黃玉)이며 나이는 16살입니다.
     본국에 있을 때 금년 5월에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어젯밤 꿈에 함께
     황천(皇天)을 뵈었는데, 황천은 가락국의 왕 수로 (首露)라는 자는 하늘이 내려보내서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곧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것이 이 사람이다. 또 나라를 새로 다스림에 있어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경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하고, 말을 마치자
     하늘로 올라갔다. 꿈을 깬 뒤에도 황천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 너는 이
     자리에서 곧 부모를 작별하고 그곳을 향해 떠나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배를 타고 멀리
     증조(蒸棗)를 찾고, 하늘로 가서 반도(蟠桃)를 찾아 이제 아름다운 모습으로 용안(龍顔)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나면서부터 자못 성스러워서 공주가
     멀리에서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어서 신하들이 왕비를 맞으라는 청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제 현숙한 공주 가 스스로 왔으니 이 사람에게는 매우 다행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그와 혼인해서 함께 이틀밤을 지내고 또 하루 낮을 지냈다.  
     이에 그들이 타고 온 배를 돌려보내는 데 뱃사공이 모두 15명이니 이들에게 각각 쌀 10석과
     베 30필씩을 주어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8월 1일에 왕은 대궐로 돌아오는데 왕후와 한 수레를 타고, 잉신 내외도 역시 재갈을 나란히
     수레를 함께 탔으며, 중국의 여러 가지 물건도 모두 수레에 싣고 천천히 대궐로 들어오니
     이때 시간은 오정(午正)이 되려 하였다. 왕후는 이에 중궁(中宮)에 거처하고 잉신 내외와
     그들의 사속(私屬)들은 비어 있는 두 집을 주어 나누어 들어가게 하였고, 나머지 따라온
     자들도 20여 칸 되는 빈관(賓館) 한 채를 주어서 사람 수에 맞추어 구별해서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날마다 지급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고, 그들이 싣고 온 진귀한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왕후의 사시(四時)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수로왕이 아유타국의 공주를 왕후로 맞이하다  (48년 7월 27일 음력)】



     수로왕 (首露王)의 8대손 김질왕(金?王)은 정치에 부지런하고 또 참된 것을 매우 숭상하였는데
     시조모(始祖母) 허황후(許皇后)를 위해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고자 하였다. 원가(元嘉)29년
     임진에 수로왕과 허황후가 혼인한 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왕후사(王后寺)라 하였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근처의 평전(平田) 10결을 헤아려 삼보(三寶)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하게
     하였다.
     이 절이 생긴 지 500년 후에 장유사(長遊寺)를 세웠는데,이 절에 바친 밭이 도합 300결(結)이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綱)은 왕후사(王后寺)가 장유사의 밭 동남쪽 표(標) 안에 있다고 해서
     왕후사를 폐해서 장사(莊舍)를 만들어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장소와 말을 기르고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三國遺事  卷 第二』 《제2 기이(紀異第二) 가락국기(駕洛國記)》
                              【왕후사의 창건과 폐지(452년 미상 음력)】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금관(金官) 호계사(虎溪寺)의 파사석탑(婆裟石塔)이라는 것은 옛날에 이 읍이 금관국 이었을 때
     시조 수로왕 (首露王)의 비인 허황후 (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건무(建武) 24년 무신에
     서역의 아유타국(阿踰?國)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하였는데 파도신의 노여움에 막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父王)에게
     말하였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명하니 곧 쉽게 건널 수 있어서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다.
     붉은 돛, 붉은 깃발, 주옥(珠玉) 등 아름다운 것을 실었기 때문에 지금 주포(主浦)라고 부른다.
     처음 언덕 위에서 비단 바지를 풀은 곳은 능현(綾峴)이라고 하며, 붉은 깃발이 처음 들어온 해안은
     기출변 (旗出邊)이라고 한다.  
     수로왕이 그를 맞이하고 함께 나라를 다스린 것이 150여 년이었다. 이때에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 또 왕후사(王后寺)
     (아도(阿道)눌지왕(訥祇王)의 시대로 법흥왕대의 전이다.)를 창건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복을 빌고 겸하여 남쪽의 왜를 진압하고 있는데 가락국본기에 자세히 보인다.  
     탑은 모가 4면으로 5층이고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 미세한 붉은 반점 색이 있고
     그 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 ≪ 본초 (本草)≫에서 말하는 닭벼슬의 피를
     찍어 검사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 (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자세히 실려 있다.  

         『三國遺事  卷 第三』《제4 탑상(塔像第四)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허황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오다 (48년 미상 음력)】
                (이상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초기 가야연맹의 주도국으로 알려진 김해 금관가야의 건국신화는『삼국유사』가락국기조(駕洛國記條)에 실려
있다. 그 가운데 시조인 수로왕의 출생과 관련된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천지개벽후 이 땅에는 나라가 없었다. 후한(後漢) 광무제 건무(建武) 18년(서기 42) 3월 계욕( 浴)날
  황금알 여섯개가 든 황금상자가 구지봉(龜旨峰)에 내려왔다. 다음날 새벽에 알 여섯개가 사내아이로
  변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이 김해에 나라를 세웠다. 그가 바로 가락국의 시조 수로왕이다. 6년 후 아유타국
  의 공주인 허황옥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오니, 그를 왕비로 맞았다’

는 것이다.

사람이 새새끼도 아닌 다음에야 알에서 태어날리는 없으니, 수로왕과 그 형제들은 아마도 다른 곳에서 이주
해 온 외래세력일 것이다. 그들은 원토착민보다 우수한 문화와 기술, 특히 뛰어난 제철기술을 갖고 세력을
모아 왕위에 오른다. 이는 왕성王姓이 '쇠김金'인 것에서 유추할 수 있고, 최근 발굴되는 뛰어난 야금기술을
보여주는 가야의 유물로도 증명된다.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의 4대왕인 석탈해와의 경쟁 설화에서 살펴 볼 수 있듯 가락국은 주변국과의 경쟁을
거치며 나라가 기틀을 잡았다.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수로왕의 혼사가 국가의 중대사로 떠올랐다.
고대국가 건국단계에서 왕비는 단순한 '임금의 아내' 차원이 아니라 왕권을 지탱하는 데에 필수적인 또
다른 권력이기 때문에, 건국신화에서도 왕비의 출신이 어떠한지를 반드시 포함하게 된다. 이때 토착민세력
은 자신들의 딸들중에서 한 명을 골라 왕비로 삼기를 요구한다.

이를 고구려를 세운 주몽신화와 비교해보자. 주몽은 떠나온 북부여에 이미 결혼하여 아내가 있음에도 정착
한 곳에서 토착세력의 유력자 딸인 소서노와 결혼한다. 세력이 미약한 외래세력으로서는 세력의 유지와 왕
권의 안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토착세력과의 정략혼이다.

그러나 수로왕은 이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만큼 세력에 자신이 있고, 기반이 안정되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왕비로 맞을 여자가 갖고 오는 것이 토착민세력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우위에 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수로왕이 신통력을 발휘해서인지, 아니면 미리 선약이 있었던지 배는
정해진 날짜에 들어왔다. 마중 나갔던 신하들은 왕의 신통력에 놀라고 기뻐하여 모든 의문은 접어두고 그 배
를 타고 온 여인을 자신들의 왕비라 단정한다. 그러나 배를 타고 온 여인, 허황옥은 콧대가 높았음인지 또는
뒤에 든든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자신감에서인지 수로왕이 직접 자신을 마중나오기를 신하들에게 요구한다.
수로왕은 이에 흔쾌히 응하고 자신의 궁에서 나와 장막으로 임시 궁전을 짓고, 허황옥을 왕비로 맞아 그곳에
서 이틀 밤과 하루 낮을 보내고 자신의 궁으로 데리고 들어온다.
후일 수로왕과 허왕후가 첫날 밤을 보낸 곳에 금관가야의 8대왕인 질지왕은 왕후사란 사당을 세운다.
뒤에서 다시 살펴 보겠지만 허황옥이 수로왕에게 직접 마중나오라 하였다는 사실과 굳이 시조인 수로왕을
제쳐두고 그 부인인 허황옥의 사당을 세운 점등은 허황옥으로 대표되는 집단이 갖고 있던 힘이 단순하지만은
않았음을 시사해준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실을 끄집어내면 뒤죽박죽되어 정리가 안되니 이 정도의 예비지식을 갖고 다시 처음
으로 돌아가 의문점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자.


◎ 의문 1. 과연 AD 48년에 인도에서 김해까지 찾아 올 수 있을만큼 항해술이 발달되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선박항해술이 발달한 현대에도 GPS와 같은 첨단기기들의 도움이 아니면
원양항해는 목숨을 걸어야 할만큼 위험하다. 나침반은 AD 11세기경인 중국 송나라때 처음으로 항해에
사용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나, 최근 연구결과 장보고선단이 활약했던 AD 9세기에도 일부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AD 1세기엔 나침반도 없었고 지도도 없었다.그런 것들의 도움없이 대략 15,000Km를
항해한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가? 아래의 지도를 참고해보면 그런 추측을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임을 이해할 것이다.





【인도 아요디아와 한국 김해간 거리측정】
직선의 붉은 선은 직선거리를 나타내며 약 4,412Km이고, 해안을 따라 그은 붉은 선은
허황옥이 해상경로로 이동하였을 때 예상 항로이며 그 거리는 약 15,612km이다.
(구글 어스로 측정,약간의 오차 있음)




항해술이란 선박의 위치를 산출하고 침로와 목표까지의 거리를 결정하여 선박을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시
키는 기술이다. 항해술의 주 요소는 결국 배의 위치를 확정하는 것과 침로를 결정하는 문제로 압축된다.
그런데 바다는 강과는 달리 쉽게 항해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항해자는 항해하려는 해역의 바람,파도,해류,
조류등과 같은 자연조건을 극복해야 한다. 출항지부터 목적지까지 해로에 대한 지식이나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한다. 주간은 물론이거니와 야간이나 시야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침로를 유지할 수 있는 기술을 갖고 있어
야 한다. 여기에서 침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배의 위치를 확정하는 작업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항들은 오늘날은 물론이고 고대 항해술 시대에도 결코 변할 수 없는 기본
적인 항해조건이다. 이런 이유로 고대항해에는 보통 연안항해가 사용됐다.

연안항해는 항해자가 육지를 계속해서 바라보면서 항해하는 것을 말한다. 연안항해는 항해자가 자신의
위치를 항상 확인하면서 항해할 수 있고, 기상이 악화되거나 밤이 되었을 때 즉시 인근 항,포구로 대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그러므로 선박이 작고 선체가 조잡하며 항해장비나 기술이 개발되지 못하였던 고대
항해술 시대에는 주로 연안 항해를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고대항해술 시대에는 연안항해의 범위가 훨씬
더 좁았다.이 시대의 연안항해는 기본적으로 시인거리(육안으로 물체를 알아볼 수 있는 거리. 대략 4km )
혹은 가시거리 내의 항해에 불과했다. 비록 시인거리내에서 연안항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바다에서의 항해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상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변하며,예기치 못한 곳에 암초가 있고,조류가 흐르는
방향과 속도를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연안의 바다에는 언제라도 조난을 당할 위험이 상존하고 있다.
특히 야간에는 복잡한 섬들과 수로 환경을 볼 수 없고 또한 목적지를 식별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 조난의
위험이 훨씬 더 크다.  현대의 항해인들도 섬이 많은 연안에서 야간에 항해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가능
한 한 피하려 하는 것이 일반적인 풍토이다. 고대의 항해자들에게는 야간에 연안을 항해하는 것이 오늘날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고대인들은 주로 주간을 이용하여 연안을 항해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한참이 지난 후대까지도 연안의 주간항해라는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에게는 사방이 수평선만 보이는 해상을 대양으로 간주했다. 시인거리 내에서 항해할 때에는 항해자
가 육지나 섬 등과 같은 물표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 항해하기 때문에 침로를 유지하는 일이 별로 어렵지 않
다. 반면에 대양에서는 사방이 똑같은 모습의 망망대해이기 때문에 항해자가 침로를 유지하는 일, 즉 키를
조종하여 선박을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필요한 기준점이 없다. 또한 넓은 대양에서는 지극히
작은 각도로 침로를 바꾸기만 해도 목적지에서 크게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다행히 주간에는 태양을 그리고
야간에는 달이나 북극성을 기준으로 삼아 동,서,남,북의 정방향을 어느 정도 식별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날씨
가 쾌청하여 태양이나 달 그리고 북극성을 잘 볼 수 있다고 하더라도 키잡이가 북북서,북북동,남남서,남남동
등의 사선 방향으로 침로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은 지극히 곤란하다. 이러한 이유로 고대인들은 대양항해를
할 때마다 정방향 항해술에 크게 의존했다.

이 정도의 상식이라면 왜 첫머리에 허황옥의 항해가 불가능하다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허황옥이 왔다고 주장하는 '아유타국'에 대해 알아보자.




※참고자료
1.창조사학과 관련된 자료는 2001년 1월 18일 ~ 2001년 2월 3일까지 국민일보에 게재된 글을 통해 볼 수
있다. 《 http://search.kukinews.com/index.asp?where=3&search=창조사학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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