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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차의 기억 - 2022 년 봄
이름 : 하동댁 2022-05-24 15:46:34, 조회 : 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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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의 나날



같은 숲

한 다원

나란히 자란 차나무라도



앞장서서 서둘러 솟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나라는 찻잎이 있고

아직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차나무도 있지만



이른 것도 늦은 것도

절기는 한치 놓치지 않은

모두 한 자연!






차밭에 서서




나 고등학교 때 사회 선생님은

연세가 있으신 지혜 가득한 수녀님이었다.

어떤 날 수업 중에 수녀님이



모퉁이만 돌면 새로운 길이 보일 거다.



라는 말씀을 하셨다.

말씀의 전후좌우 배경은 기억할 수 없으나 그 뜻이 너무 멀어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무지개 저 너머에 새로운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따위의 상상을 즐기던 어린 나는,

마치 그거랑 이거랑 비슷한 건지도 모르겠다며

모퉁이에 대한 기대감을 키웠었지.



잊고있던, 모퉁이, 는

산골에 둥지를 틀고 차를 덖기 시작하며 마음 깊숙한 곳으로

훅!

돌아왔다.



봄이면 봄마다

스물 한 해 동안 차 만들기를 반복할 적에

차 맛이 부족하면, 이 좁은 길모퉁이만 돌면 큰 길이 나오겠거니

하며 좌절한 마음을 다독였고

차 맛이 만족스러울 땐, 힘을 이만큼 더 뼀으니 이 모퉁이만 돌면,

거기,에 가 닿으려나 기대했었다.



해를 거듭하여 봄은 더 성숙해지는데

나는, 어쩌면 살아가는 내내, 모퉁이를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이 든다.



새로운 길이란 무얼까?

비단 차의 맛과 향기만이 길의 끝은 아닐지도 모른다.







금수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금수저에 얘기가 미쳤다.



우리도 아는 사람들 있잖아. 금수저 가진.



조부모님이 차나무를 심어서

부모님이 이어 차를 만들고

그이 부부가 세상에 차를 알리더니

드디어 장성한 자녀들이 가업을 잇겠다고 나섰다는

산너머 댁 식구.



오랜 세월 차를 대하는 마음과 마음이

하나에서 흩어지지 않고 이토록 한결같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대대로 면면히 이어진 중심 단단한 그 귀한 마음 자체가

금수저네.



부럽다.



고 말했더니

남편이 웃으며 한마디 던진다.



과거에 처음 차를 시작하던 때의 나를

미래 나의 조부모로,

차를 기운차게 만들고 있는 현재의 나를

미래의 부모로,

차의 지혜를 깊이 이해 할 미래의 나를

현재의 자식으로,

바라 보라고.



아...!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한강



지난 해 11월,

계절이 빠르게 겨울로 들어설 때

우리 눈앞엔 이미 봄이 보였다.



몸으로 다시 봄을 맞기 전에

마음으로 먼저 새로운 봄맞이를 하고 싶어서

알려졌거나 알려지지 않았어도 각자의 스토리를 담고 있는,

우리 세상 밖의 차를 구해 마시기 시작했다.



헤아려 보니 벌써 6 개월을 이어왔다.

그간 마신 차는 종류 불문하고 200가지가 넘었고,

차를 마시며 남긴 빼곡한 기록 또한 얇은 노트 한권을 훌쩍 넘겼다.

진지했고 집중했다.



맑고 향기로운 차를 만나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였고

탁하고 어두운 차를 만나 아쉬움으로 한탄하였다.

얼굴 모르는 그들 차 만드는 사람들의 사연이 모두 우리의 이야기였다.



4월의 봄

지리산 자락 곳곳에 자리한 이 다원 저 다원에서

푸릇하게 돋은 찻잎으로 녹차 덖는 향이 이야기로 엮여

우렁찬 나팔소리와 같이 골짜기 마다 울려퍼진다.



맑은 산속 흘러흘러 여기에 닿은 깨끗한 물로

정성껏 만든 햇차를 우려 입안에 가만히 머금는다.

불현듯 떠오른다.



한강의 맛이로구나!



먼나라 여행에서 돌아와 한강을 마주하던 그 기분처럼

엄마 품같이 반갑고,

따스하고 안락하고, 여유롭고 익숙하고 너그러운...



우리 땅이 키우고

우리네 사람들이 덖은

한국 차의 맛!







차의 어버이



자연의

거친 차나무 잎이



불과 인연을 맺고

불의 지극한 열정과 사랑으로

차의 몸을 얻었다.



차의 몸이 이내

자애로운 물과 인연을 맺으며

깊고 긴 숨이 트인다.



찻잎이 불과 물로서

온전한 차가 되었으니

비로소



세상과 마주한다.







거리두기



니가 너무 멀어 내 손에 닿질 않기에



가까이 아주 가까이

바짝 다가섰더니 무슨 일인지



니가 잘 보이지 않아...







차의 기억



숲으로 가득 쏟아지던 봄햇살

매화향기 울려퍼지던 꽃그늘 아래

조잘조잘 작은 새들의 귀여운 수다

귓가를 간지르다 크게 하품하고 도망치던 바람

그 바람 사이 늠름하게 휘젓던 까마귀의 날갯짓

놀란 고라니 녀석 꽁지 빠지게 겅중대던 모습

쫄랑쫄랑 줄서서 찻잎따는 사람 발꿈치를 따르던 고양이 네 마리

찻잎 따시랬더니 대추나뭇잎 한 움큼을 따놓고 천진스럽던 어머니의 웃음

차분히 내리는 빗속에 흔들흔들 대나무 이파리...



뜨거운 홍차에 스민

봄날의 기억들







길을 보라




차밭에서 찻잎을 딸 때

오로지 눈 앞의 찻잎만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내가 지금 어디쯤에 와있지?



궁금해진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다시 돌아서서 확인할 때,

시작점으로 부터 많이 오긴 왔는데 때때로 처음에 가고자 했던 길을 벗어나 엉뚱한 곳에 빠져있다면

늦기 전에 계획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길을 시작한다.



이번에는 지나치게 손끝에만 몰입하지 않도록 수시로

나도 체크하고, 식구들끼리도 서로설 어디쯤 왔는지 알려주기로 한다.

그러다가 드는 생각!



삶을 살 때도 목표로 삼은 이 길에서

당장 발 아래의 땅만 보고 걸으니 얼마나 왔는지 몰라 자주 마음이 지쳤었지.

고개를 들어 멀리 보고,

필요하다면 힘들어도 계획을 수정하는 용기도 필요한거야.



지금이 바로, 그 때, 로구나!







마지막 찻잎



찻잎을 따던 봄의 시간은

차와 함께 우리의 내면을 섬세하게 살피는 기회였다.



생각지도 못한, 우리 안의 깊숙한 곳에서

수시로 희노애락의 감정이 떠올라 놀라웠다.



찻잎의 빛깔이 연두에로 초록으로 번지는 동안

찻잎 따는 날래진 손끝만큼

복잡했던 감정들은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어져서

선선히 납득하고 순하게 이해했다.



새롭게 살아갈 힘은

늘 마지막 찻잎따는 날로 부터 시작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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